위대한 사역 뒤에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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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생명의부양자 작성일19-03-27 07:12 조회1,16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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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사역 뒤에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금식기도는 기도 중에 백미이자 영적 훈련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금식기도를 한 여러 인물의 기사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마4:1~2)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받을 때 사십 일동안 전혀 먹지 않고 금식했습니다. 그러고 난 후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 두 개를 받았습니다. 또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했을 때 하나님은 배부르게 먹이신 후에 삽십 주야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호렙 산에 이르자 그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금식기도를 했다는 기사는 나오지 않지만 소명을 받고 곧바로 사역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3년 동안 아라비아로 가서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위대한 사역 뒤에는 이처럼 언제나 고통스런 준비의 시간이 있습니다. 피아노 연주를 할 때 청중들은 연주회의 화려함만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연주를 위하여 피아니스트는 손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금식기도는 훌륭한 영적 훈련입니다. 이러한 영적 훈련 없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면 금식이란 무엇입니까? 금식이란 말 그대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먹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당연히 배가 고프지요. 어떤 사람이 사십 일을 금식하며 기도한 사람에게 금식기도를 끝낸 소감을 물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무슨 환상을 보았다" 등의 말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금식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야 배고픈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얼마나 귀한 깨달음입니까? 그는 아주 실제적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굶으면 배고프다는 사실은 만고 불변의 진리입니다. 배고프면 먹을 것밖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 육체에 일어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실제적으로 영적인 것과 상관이 있습니다. 먹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먹을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하게 되고, 굶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금식하는 가운데 배고픈 사람을 이해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더 긍휼히 여기게 됩니다. 자기가 배고파 보아야 남을 이해하고, 인간의 육신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영적인 싸움을 위한 준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갖는 사람은 배고픈 것, 못 입는 것 등 환경의 고토잉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금식을 해 본 사람이라면 모두 느끼겠지만 인생의 의미까지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좋은 옷 입는 것, 화장하는 것, 화려한 사치품을 갖는 것, 인간관계의 모든 문제 등이 다 의미가 없고 시시해집니다. 다만 배가고파 힘든 만큼 왜 기도를 하는가에 집중하게 되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금식기도는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뿐만 아니라 금식을 하면 내가 얼마나 먹는 일에 노예가 되어 있었나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먹는 것에서 자유한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 생기며, 우리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금식을 아주 불필요한 것, 혹은 율법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반대로 하루 먹고 뜻대로 안 되면 하루 금식하고, 또 하루 먹고 하는 금식병에 걸린 사람도 있습니다. 또 듣기에는 사십 일 금식을 하다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의무적이거나 과도한 금식은 해롭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금식의 본뜻을 모르고 금식을 무기로 삼는 잘못에서 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금식의 의미를 아는 것은 우리의 건강한 영적 생활과 육적 생활에 참으로 중요합니다.
"기도하면 행복해집니다" 중에서--
금식기도는 기도 중에 백미이자 영적 훈련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금식기도를 한 여러 인물의 기사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마4:1~2)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받을 때 사십 일동안 전혀 먹지 않고 금식했습니다. 그러고 난 후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 두 개를 받았습니다. 또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했을 때 하나님은 배부르게 먹이신 후에 삽십 주야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호렙 산에 이르자 그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금식기도를 했다는 기사는 나오지 않지만 소명을 받고 곧바로 사역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3년 동안 아라비아로 가서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위대한 사역 뒤에는 이처럼 언제나 고통스런 준비의 시간이 있습니다. 피아노 연주를 할 때 청중들은 연주회의 화려함만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연주를 위하여 피아니스트는 손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금식기도는 훌륭한 영적 훈련입니다. 이러한 영적 훈련 없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면 금식이란 무엇입니까? 금식이란 말 그대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먹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당연히 배가 고프지요. 어떤 사람이 사십 일을 금식하며 기도한 사람에게 금식기도를 끝낸 소감을 물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무슨 환상을 보았다" 등의 말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금식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야 배고픈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얼마나 귀한 깨달음입니까? 그는 아주 실제적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굶으면 배고프다는 사실은 만고 불변의 진리입니다. 배고프면 먹을 것밖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 육체에 일어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실제적으로 영적인 것과 상관이 있습니다. 먹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먹을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하게 되고, 굶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금식하는 가운데 배고픈 사람을 이해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더 긍휼히 여기게 됩니다. 자기가 배고파 보아야 남을 이해하고, 인간의 육신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영적인 싸움을 위한 준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갖는 사람은 배고픈 것, 못 입는 것 등 환경의 고토잉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금식을 해 본 사람이라면 모두 느끼겠지만 인생의 의미까지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좋은 옷 입는 것, 화장하는 것, 화려한 사치품을 갖는 것, 인간관계의 모든 문제 등이 다 의미가 없고 시시해집니다. 다만 배가고파 힘든 만큼 왜 기도를 하는가에 집중하게 되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금식기도는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뿐만 아니라 금식을 하면 내가 얼마나 먹는 일에 노예가 되어 있었나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먹는 것에서 자유한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 생기며, 우리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금식을 아주 불필요한 것, 혹은 율법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반대로 하루 먹고 뜻대로 안 되면 하루 금식하고, 또 하루 먹고 하는 금식병에 걸린 사람도 있습니다. 또 듣기에는 사십 일 금식을 하다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의무적이거나 과도한 금식은 해롭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금식의 본뜻을 모르고 금식을 무기로 삼는 잘못에서 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금식의 의미를 아는 것은 우리의 건강한 영적 생활과 육적 생활에 참으로 중요합니다.
"기도하면 행복해집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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